△  대마도

 

대마도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와 관련된 역사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대마도 곳곳에는 항일운동으로 대마도에 유배돼 단식투쟁으로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와 고종의 딸로 태어나

대마도주와 강제 결혼한 비운의 황녀인 덕혜옹주의 결혼기념비,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해주던 공식 외교사절인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고려문과 그것을 기념하는 조선통신사비 등 우리 역사와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일본 속의 한국을 느끼게 한다. 

우리 역사의 궤적뿐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자연도 한국 여행객을 끌어들인다.

3만9천 명이 거주하는 대마도는 면적만 치자면 제주도의 절반도 안 되지만, 섬의 89%가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으며,

길게 뻗은 리아시스식 해안선의 길이가 자그마치 915㎞로, 제주도 해안선(386㎞)보다 두 배 이상 길다.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과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뿌려진 일본 최고의 비경을 자랑하는 아소 만,

대마도 내에서 유일하게 아소 만을 사방으로 볼 수 있는 에보시타케 전망대, 거친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흰 등대로 유명한 쓰쓰자키, 신선한 공기 속에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규슈(九州) 100대 명산 중 하나인 시라다케, 일본의 아름다운 해변

100선에 꼽힌 미우다해수욕장 등 수려한 자연환경도 대마도의 매력이다. 

 

 △  오늘은 대마도 산행을 가기로 한다 대구에서 새벽03시30분에 출발이다

모처럼 새벽에 집을 나서니 새벽 공기는 상쾌하지만 약간 쌀쌀하다

신대구 부산고속국도를 따라 부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수성I.C부근에서 산행대장이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단다

할수 없이 집으로 열락해서 택시 편으로 받으니 40분이 지체 되었다

그래서 기사는 새벽에 부산까지 고속으로 달려서 항만 터미널 근처에 도착한다...

 

 △  [06시06분]  항만 근처 도로에 버스를 주차한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여기서 아침을 먹는다

 도로갓길에서 아침을 먹기는 처음이다...

 

  [06시17분]  부산 항만 터미날에 도착하고 잠시 기다리다 수속을 밟는다...

  

△  부산 항만터미날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  우리가 타고갈 대아 고속 배...

  

 

  [08시58분]   대마도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입국 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부산에서 01시간10분만에 도착하는데 수속을 밟는데50분이 소요되었다

결국 히타카츠항에 육지에 내려서니09시50분이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대마도에 여행을 많이 간다 

주말이 되면 2.000여명이 입국 한단다...

  

 

△  히타카츠항에 도착하니우리가 타고갈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10시30분]   버스는 어느 산길을 달려 공터가 있는 잔디 밭에서 점심을 먹는다

도시락 먹을만 하다

 친구는 입맛이 맞지 않는다면서 억지로 먹는다...

  

 

 

△  계곡으로 맑은 물이 흘려 내린다...

  

 

 

△  [12시39분]   이즈하라 주차장에 도착하고 여기서 오늘 유명산(有明山)아리아케산 등산을 하기로 한다

날씨는 포근하고 하늘도 맑다

여기 날씨도 우리보다 조금 봄이 빠른것 같다...

  

△  [13시10분]   이제 유명산(有明山)아리아케산으로 등반을 하기로 한다...

  

△  조선국통신사지비을 지나면서 산행을 시작한다...

  

 

 

 

 

 

△  산행을 하면서 조망터에서 바라본 이즈하라 항 바닷물이 너무나 깨끗하다...

  

 

 

△  성벽을 지나고...

 

 

 

 

 

  [13시47분]  청수산 정상에 도착하고 일부는 여기까지 오르고 우리는 유명산 까지 오르기로 한다

정상에는 조그만한 나무 막대기에 청수산이라 쓰여있다 

 삼각점이 있고 사방 조망이 트인다

등로는 잘 정비되어 있다

 간간히 진달래꽃들이 보이고...

 

 

△   좌측이 우리가 가야할 유명산...

  

△  간간히 동백꽃이 보이지만 꽃봉우리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   빽빽한 이노끼 (편백)나무숲길을 지난다

온산이 주로 편백나무들이 주종을 이룬다

이제 계속 된비알이 이어진다

가끔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모두 한국 사람이다

어느 한국의 산에 온 느낌이다...

 

 

 

△  돌탑이 보이고...

 

△  [14시41분]   이정목이 있는 유명산에 도착한다

사방 조망이 트이고 정상에는 우리나라처럼 삼각점도 있다

저멀리 산속에 녹차밭도 보인다...

  

 

 

△   아리아케산에서 바라본 암능으로 이루어진 (시라타케) 정상을 댕겨 본다...

  

△   오늘 산행은 원점회귀 산행이다...

  

 

 

 

 

 

   다시 이즈하라 시가지가 보이고...

 

△   오늘 산행중 가장큰 바위...

 

△   일본은 신사의 나라다

절과 함께 모신 비석들 줌으로 한번 댕겨본다...

  

△   다시 이즈하라 항구가 보이고...

  

 

 

 

△  [15시48분]   다시 원점회귀한다

이즈하라 주차장에서 후미를 기다린다 

16시40분에 다시 시내관광을 나선다...

  

△   이즈하라 도심의 하천 너무나 깨끗하다

고기들이 많이 보인다...

 

 

△  [16시55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

면암 최익현 선생은 애국항일운동을 일으켜 쓰시마에 유배된뒤 순국했다

훗날 뜻 있는 사람들이 그 넋을 기려 슈젠지(修善寺)수선사 절 안에 비를 세웠다

대마도 곳곳에는 우리 조상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17시23분]   다시 인근에 있는 팔번궁신사로 향한다...

 

△   일본은 경차의 나라다

 골목길도 좁고 앙증맞은 경차들이 대부분이다...

 

 

 

 

 

 

 

 

△   신사를 구경하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작은 수로에는 금붕어들이 노닐고 다슬기들이자라고 있다

자연 환경이 잘보존되어 있고 도로가 쓰레기 없이 너무나 깨끗하다...

  

 

 

 

△  [17시41분]   다시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로 향한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1912.05.25~1989.04.21)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19시40분]   한국인이 경영하는 바닷가 민박집에 도착하여 져녁을 먹는다

해물구이 바베큐라 하는데 그리 푸짐하지는 않다...

  

 

 

 

△  오늘 모든 일정을 마무리 하고 10시30분에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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