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시00분]   오늘은 초딩 친구들과 다시 대마도 여행을 하기로 한다

2주전에 산악회에서 대마도 산행 여행을 하고 다시 오늘 대마도 여행을 떠난다

대구에서06시00분에 출발하여부산으로 향한다

오늘은 대마도 남쪽 이즈하라항에 14시27분에 도착한다

히타카쯔항에는 부산에서01시간10분 이즈하라항까지  02시간10분이 걸린다

오늘 날씨는 무척 좋다

파도도 잔잔해서 배멀리를 하지 않고 대마도에 도착 한다...

 

△ [07시09분]  대구 칠곡I.C에서 버스출발하여 성서 홈플러스에서 다시승차하고 팔공산

I.C에서 다시 모두 탑승하여 부산으로 향한다

신대구부산 고속국도를 따라서 청도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간다...

  

 

△  [08시22분]   부산국제 항만 터미날에 도착하고 여기서 가이드를 만나고

터미날에 한동안 머무른다...

  

 

 

 

 항만 터미날에서 잠시 소주도 한잔하고 과일도 먹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대마도로 향한다...

  

 

△  [11시10분]  우리가 타고갈 오션플라워 배내부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점심을 먹는다

여행사에서 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  [13시20분]   02시간10분이 걸려서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한다

이제 한동안 수속을 밟는데 무척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본은 입국이 엄청 까다롭다

지문도 찍고 얼굴 사진도 찍고 입국장이 좁아서 많은 시간이 걸린다...

  

△  [14시34분]   드디어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수속을 밟는데 01시간 이상 걸린다

저멀리 지난번 등산한 아랫쪽 청수산이 보이고

정말 한국 사람들은 성격이 급한데 모두 불만이다...

  

△  간단히 가이드님 한테 오늘 하루 일정을 보고 받고서 이제 이즈하라 마을로 도보로 진행한다...

  

△  깨끗하게 정리된 이즈하라 마을길...

  

 

△  이즈하라 항구 바다 정말 깨끗하다...

  

 

 

△  이즈하라 마을길...

 

 

 

△  [15시22분]   슈젠지(수선사)에 도착하고

면암 최익현 선생은 애국항일운동을 일으켜 쓰시마에 유배된뒤 순국했다

훗날 뜻 있는 사람들이 그 넋을 기려 슈젠지(修善寺)수선사 절 안에 비를 세웠다

대마도 곳곳에는 우리 조상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시 이즈하라 도심 하천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천 정말 깨끗하다...

  

저다리 너머 이즈하라 항구다...

 

 

건물유리창에 빨간 역 삼각형이 보인다

가이드님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불이 날때 소방관들이 쉽게 표시된 유리창을 깨고 진입 한단다

다른 유리창보다 쉽게 깨어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한다

지혜들이 대단하다...

 

 

 

 

 

 

 

잠시 쉬어간다...

  

 

 

 

 

 

 

△  [16시46분]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에 도착 하고...

덕혜옹주(1912.05.25~1989.04.21)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과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1916년 준명당()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귀인양씨)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조현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흘러가는 데로>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이혼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다시 팔번궁신사 방향으로 향한다...

 

마을 하천에 금붕어들이 노닐고 다슬기들이 많이 서식한다...

 

 

△  [17시15분]   팔번궁신사(하찌만구신사)에 도착하고...

 

 

 

 

 

 

 

 

이즈하라마을 하천 지금은 썰물로 인하여 물이 많이 없다...

  

 

 

△  [17시43분]   드디어 져녁을 먹으려 간다...

  

 

 

 

 

 

 

△  [18시54분]  오늘 우리가 묵을 쓰시마대아호텔 이즈하라에서는 제일 좋은 곳이란다

호텔이라지만 우리나라 여관보다도 좋지 않다

여기서 여장을 풀고 잠시 씻고 모두 모여서 술한잔 하기로 한다...

  

 

 

 

 

 

마침 큰방이 있어서 몇명은 쉬고 모두 모여서 모임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회포를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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